장애예술 – 장애가 아닌 우리의 예술을 보라

아이삭 림은 장애 예술에 관한 온라인 포럼, 우리가 없으면 우리에 대한 것도 없다: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예술가들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싱가포르 수어, 한국 수어, 언어 통역과 한국어와 영어 자막이 제공되는 전체 비디오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쓴 플러스 사이즈 남성으로, 티와 반바지 차림으로 편하게 입은 채 집필 중이다. 발 받침대에 다리를 대고 전원 보조 장치가 부착된 파란색 프레임의 휠체어에 앉아 있다.

이 소개가 어색한가? 포용성을 중요시하는 예술과 공연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시각적 설명은 특히 눈이 보이지 않거나 시각에 장애가 있는 친구에게 화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

2022년 3월 5일에 열린 <우리가 없으면 우리에 대한 것도 없다: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예술가들> 포럼에서 각 패널들은 이렇게 발표를 시작했다. 아츠 이퀘이터, 이퀄 드림스, 그리고 한국의 최태윤 스튜디오가 공동 기획한 장애 예술: 한국과 싱가포르의 비평적 대화 진행 행사의 일부였다. 포용성 있는 온라인 행사를 위해 실시간 자막, 번역, 수화 통역, 스크린 리더용 발표 자료를 제공했다.

나는 이 세션에서 다음과 같은 싱가포르와 한국의 장애 예술 분야의 예술가, 동료들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음악 프로듀서이자 공연 예술가인 다니엘 바우탄 (윌스미스) (싱가포르), 시각 장애인이자 다학제적 예술가이자 교육자인 클레어 테오 (싱가포르), 안무가이자 연구자, 예술 교육자인 노경애 (한국), 그리고 시각 장애인 사운드 아티스트 전경호 (한국)가 그러하다.

있고/없는 꼬리표: 우리는 여전히 우리인가?

몇 명의 패널리스트가 제기한 시의 적절한 사항 중 하나는 꼬리표의 문제였다. 장애인에게 어떤 꼬리표가 붙는지가 중요한가? 우리 스스로에게 어떤 꼬리표를 붙여야 하며, 이런 꼬리표는 우리와 우리 작품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장애가 없었다면 작품의 의미가 덜해졌을까? 예를 들어 다니엘은 자신의 작품을 장애로 정체화하거나 연결 짓고 싶지 않다고 했다. 왜냐하면 “대중에겐 상관없는 문제” 이자 “꼬리표가 낯섦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나는 꼬리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그 긍정적인 면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특히 상업적 측면에서의 꼬리표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단어와 꼬리표에 대한 대화에 덧붙여, 전경호가 자신의 흥미로운 음악적 경험을 공유해주었다. 단순히 청각적인 요소로서의 소리와 음악을 재정의한 그는 소리에 질감, 맛, 여러 유형적인 재료를 더해 다시금 꼬리표를 붙였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 소리를 “익힌 만두”에 비유하고, 첼로를 “튀긴 만두”로 표현했다. 이런 접근 방식과 그가 만드는 사운드 스케이프는 그를 단순한 타악기 연주자나 음악가 그 이상으로 보게 한다. (나 나름대로 그에게 체험형 사운드 아티스트라고 “꼬리표”를 붙여본다.)

우리 사회에서 꼬리표란 자신들이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쓰이는 도구인 것 같다. 낙인 찍히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특히 자신과 자신이 해온 일을 축소하는 것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또한 그 꼬리표를 자신의 장점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고정관념에 따라 행동하는지 아닌지를 재고해봐야 한다. 언제쯤이 되어야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희화화하지 않게 될 것인가?

개인적 장애를 떠나, 작품이란 우리가 누구인지를 표현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가장 창의적인 그 무엇이다. ‘영감’이라는 용어에 대한 반발도 몇 번 언급되었는데, 그것을 거부하면서도 우리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올 때까지는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지 못할 것 같다. 모든 분야의 장애인들이 힘써서 싸워야 할 집단적 투쟁이다. 그 대신 받아들여야 한다. 적어도 당신은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기 때문이니 말이다.

다양한 기량(abilities)과 장애(disabilities): 모두를 위한 무대

노경애는 청각 장애인, 시각 장애인, 뇌성 마비 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애와 기량을 가진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해왔다. 이 협업자들과 함께 일 하면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사물을 해석하고, 가능한 수단을 이용하여 즉흥적으로 만들어 내는지, 자신만의 예술을 만들기 위해 합리적으로 도전하려 하는지에 집중했다고 했다.

이는 감각과 질감, 소리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고 발전시켜나가는 전경호의 여정과도 닮았다. 그 또한 수년 간 지휘자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자신의 방법을 연구하며, 전 세계 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에서 공연했다.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장애인이 예술 작품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적응밖에 없는가? 내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다. 손뼉이 맞아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지만, 두 발이 맞아도 되고, 한 손과 한 발이 맞아도 된다. 장애 예술가의 작품은 온전히 그의 것이며, 제작자나 관객에 맞춰 적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장애인이 원래 주어진 역할이 아닌 것을 수행해야 한다면 적응이 필요하다. 사회로부터 배운 것이 있다면 유연하게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예술가는 그래야 한다.

클레어는 말했다. “장애인이 장애인 역할만 해야 하는가” 라고. 로미오가 휠체어를 탄 줄리엣과 한 무대에 있는 것은 볼 수 없을까? 청각 장애가 있는 무용수가 청인 무용수와 함께 맞춰 공연하는 것은 본 적이 있는가? 뜻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있을 것이다.

나는 2021년 싱가포르 국제 예술 축제에서 더 네세서리 스테이지(The Necessary Stage)의 <돌아오지 않는 해(The Year of No Return) >앙상블에 참여한 적이 있다. 처음 초대를 받았을 때는 주저했다. 그러나 리허설을 하는 동안 다른 앙상블과 나는 동등한 대우를 받았고, 안무가가 앙상블의 내 움직임 시퀀스 부분이 편한지를 확인하는 정도였다. 최종적으로 오늘날 이 사회의 다양성을 표현하는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우리 모두는 무대에서 빛났다. 싱가포르가 약속한대로 사회적 평등은 “인종, 언어, 종교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거기에 ‘기량ability’ 을 추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작품의 완성도: 과연 누구의 기대인가?

실시간 토론 시간에 ‘완성도’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완성도가 좋다는 것은 무엇인가? 완성도는 누구의 기준에 맞춰져 있는가? 좋은 완성도의 정의는 무엇인가?

클레어는 차선책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완성도가 가장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경애는 <듣다> 프로젝트를 공유하며, 결과물로서의 완성도를 추구하기보다 예술가의 생각과 과정의 무형적인 측면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전경호는 올바른 의미의 완성도란 최종 메시지가 작품을 통해 명확히 전달될 때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완성도 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작품의 진정성이라고 생각한다. 전경호가 말한 것처럼 예술가 (혹은 단체)가 진정성 있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만들려면, 의도한 메시지가 작품을 통해 전달되어야 하며, (가지고 있는 자원을 고려하는 한도 내에서) 진심을 담아야 하며, 그 작품을 통해 대화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양국의 장애 예술 현장은 여전히 성장, 발전 중이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일부 작품이 다른 작품만큼 다듬어지지 않을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아마추어로 간주되는 작업은 항상 있지만 작업 과정, 자금 및 자원, 관객 교육을 포함하는 더 큰 대화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창의적으로 표현하고 작품을 통해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관객이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 없이 보고 듣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 장을 더 평평하게 만들고, 창작 과정을 개선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장애 예술가와 예술 단체가 이러한 모든 영역의 개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 당장은 가진 수단을 이용해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적합한 협업을 찾아야 한다. 클레어가 말했듯, “독립적으로 우수한 예술을 만드는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협업, 멘토링은 물론 전문 지식, 경험, 자원을 교환할 수 있는 공유의 공간에 투자하고, 이런 공간을 환영”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여기 있는 우리를 보라

장애 포용성과 예술의 다양성에 관한 대화와 관심이 최근 몇 년 동안 증가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최근 장애를 갖게 된 사람으로서, (나는 2019년 말에 휠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싱가포르에서 계속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 (극작가이자 퍼포머였다)이 행운으로 느껴진다. 지난 몇 년 동안 팬데믹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 장애 주도적, 포용적 예술이 증가한 것을 목격했다. 장애에 대한 사회적 시각은 느리지만 그래도 바뀌어 가고 있다.

나는 장애인 예술가들 개개인이 예술을 통해 전할 이야기와 경험이 있다고 믿는다. 함께 힘 있는 (동기와 영감을 주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비장애인 예술가와 작업을 할 때, 서사에 결을 더하며 적응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고, 충분히 빛날 자격이 있다.

따라서 장애인들을 보되, 우리의 차이점이 아닌 예술적 재능을 보라. 우리와 함께 탐색하라. 우리는 여기에 있다. 우리 없이는 우리에 대한 것이 아무것도 없도록.

이 행사의 비디오를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이 기사의 영어 원본을 확인하세요: https://artsequator.com/nothing-about-us-english

영/한 번역: 강민형

이 컨텐츠는 2022년 3월 5일 진행 된 온라인 포럼 ‘장애 예술: 한국과 싱가포르의 비평적 대화’의 한 꼭지인 ‘우리가 없으면 우리에 대한 것도 없다: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예술가들’에 대한 글입니다. 이 행사는 아츠이퀘이터(ArtsEquator), 이퀄 드림스 (Equal Dreams), 최태윤 스튜디오에서 주최했습니다.

이 콘텐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0-2021 한국-싱가포르 문화예술 교류 협력 프로그램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유료 광고를 통한 수익은 아츠 이퀘이터의 운영비, 작가와 콘텐츠의 사례비로 쓰입니다. 후원 가능한 콘텐츠와 후원 불가한 콘텐츠에 대한 엄격한 정책을 따르고 있으며, 편집 정책은 이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아이작 림(Isaac Lim)은 2개 국어를 구사하는 작가이자 퍼포머이며, 휠체어 사용자입니다. 싱가포르 국립 대학교의 시어터 연구 프로그램을 졸업했고, 주로 연극, 공연 리뷰, 광고 카피를 씁니다. T:>Works의 공연 Incarnation of the Beast, 영화 Young & Fabulous에 출연했습니다.  Between Consciousness(2016), Project Understudy(2016), Go Home(2017), I am Mei(2019), What is Sex?(2020)등의 극본을 썼습니다. 

About the author(s)

Isaac Lim is a bilingual writer (English & Chinese) and wheelchair-using performer. A graduate of the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s Theatre Studies programme, he mainly dabbles in writing plays, performance reviews and advertising copy. Isaac was previously seen on stage in Incarnation of the Beast (T:>Works) and on-screen in the film Young & Fabulous (2016). A selection of plays he has written include Between Consciousness (2016), Project Understudy (2016), Go Home (2017), I am Mei (2019) and What is Sex?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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